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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작한 심연

The Flat Abyss

가설 천장, 페인트, 스프레이 페인트, 거울 필름, <Blank>, <Meaningful>, <Infinitie>,

진행 작품, 작업 도구, 작업 부산물_615cm x 775cm x 260cm_2016

temporary ceiling, paint, spray paint, mirror film, 〈Blank〉, 〈Meaningful〉, 〈Infinitie〉, artworks in progress, work tools, by-products of 〈The Flat Abyss〉_615cm x 775cm x 260cm_2016

무기력을 공간화하고자 했다. 관람 중 머리를 수그리게 만드는 경사 천장, "가만히 있으라"라는 뜻의 모스 코드로 점멸하는 〈Blank〉, 직간접적으로 무기력을 초래하는 말들을 담은 거울 필름, 해체한 작품들과 작업 도구, 작업 부산물 등을 이용하여 무기력의 정경과 서사적 관람 동선을 구성했다. 심연은 직면의 요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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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문제는 무기력이야.' 이렇게 진단을 내리자 그간의 많은 것들이 이해되었다. 너무 명쾌해서 오히려 의심이 들기도 했다. 동시에 이런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이것을 여태껏 무기력이라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래서 처방 이전에 복기부터 해보았다. 돌이켜 보면 수시로 (지금 이 상태가) '싫다'는 마음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사소했다. 막연한 불안에 찌든 의식을 자극하지 못했다. 단순 피로나 게으름 따위와 쉽게 혼동되었다. 치밀어 오른 거부감은 그 속에서 함께 흩어지고는 했을 것이다. 그렇게 십여 년을 탕진했다. 그러다 문득 이것에 '무기력'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게 되었다. 호명은 대상에 형태를 부여했고, 이에 대한 싫음은 별안간 역치에 다다랐다.

 

여기서 말하는 무기력은 단순히 수직으로 사람을 끌어내리는 중력이 아니다. 복잡한 양태로 사람을 와해시키는 중독이다. 이를 테면, 이것은 틈틈이 무의미한 일을 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 따른 지겨움이 결국 무언가를 하도록 만들 힘을 엉뚱한 곳으로 소진시키고, 그래도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안정적으로 공급한다. 그 결과 해야 할 일과 필요한 성찰은 거듭해서 '나중에'로 밀려났고, 사실상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상태로 오늘에 이르렀다.

 

무기력에 빠진 삶은 끔찍하다. 희박한 기력으로 운영하는 생활이기에 움직임은 짧고 탈진은 길다. 내가 봐도 한심하다. 자존감이 남아나질 않는다. 그로 인한 자기혐오는 제 눈에만 머물지 않는다. 주변 모두가 나를 한심하게 보는 듯하다. 그래서 더더욱 자신을 증오하며 움츠러들었다. 이게 아무리 괴로워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혐오스러운 것을 혐오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으므로 자기학대는 윤리였다.

 

후회스럽다. '싫다'는 스스로 보내는 경보였다. 그것조차 '귀찮아'하지 말았어야 했다. 너무 긴 세월을 영문도 모른 채 식물인간처럼 보냈다. 이제라도 항명한다. 무기력에 대한 책들을 사고, 운동을 시작했다. 더불어, 무기력을 시각화하고 언어화하는 작업을 통해 그간 방치해온 나의 심연을 들여다볼 것이다. 이 작업은 어떤 필요에도 가만히 있게 만드는 무엇에 대한 싫음의 실천이며, 나로부터 한사코 외면당한 나에 대한 응시다.

작업후기

1. 무기력에 대한 진저리로 시작한 작업이었다. 외과의사가 메스로 종양을 도려내듯 나로부터 무기력을 축출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의 무기력을 재현하면서 막무가내로 날 선 감정은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무기력은 사회적 바이러스이기도 하지만, 자연스러운 생체 현상이자 경보이기도 하다. 전자의 경우라 할지라도 일단 발현된 무기력은 나와 화학적으로 결합된 상태가 된다. 따라서 절단술 같은 식의 속 시원한 제거는 불가능하다. 무기력의 극복은 오히려 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수용과 그것을 대하는 태도의 훈련이라는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을 지난한 응시를 통해 겨우 받아들이게 되었다.

 

2. 자기 응시는 작업 동기를 새롭게 인식하는 것으로도 이어졌다. 이전까지 나는 사회적 문제들을 다뤄왔다. 작업은 그에 대한 비판이었고, 이것을 당연한 대응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작업에서는 나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에 대한 나의 심리를 함께 들여다보게 되었고, 내 작업의 주요 동기가 '싫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돌이켜 보니 이전의 작업들도 마찬가지였다. 소재에 대한 적개심, 혐오, 경멸 등 부정적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나의 비판적 작업은 윤리적 당위의 미적 실천이 아니라, 원초적 반응의 문화적 위장으로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3. 그리고 이것은 다시 무기력과 이어진다. 나는 좋아하는 것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싫어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서' 작업을 해왔다. 싫어하는 것을 다루는 작업을 계속 해나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작업적 무기력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작업뿐만이 아니다. 나는 늘 어떤 것이 싫어서 하지 않거나, 어떤 싫은 요소 때문에 하던 것을 그만두었다. 싫어하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좋아하는 것을 아는 것은 더 중요하다. 무슨 일을 하든 싫어하는 것들에 부딪치게 된다. 그때 '그래서' 그만두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케 하는 것을 갖고 있어야 한다. 나는 그것을 찾는데 소홀했다.

 

4. 왜 그랬을까? 부정적 진심을 드러낼 때에 비해 긍정적 진심을 드러낼 때 유난히 더 쉽게 무시당하거나 웃음거리가 되고는 했던 게 떠오른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그에 대한 호감을 변호하는 데 에너지를 쏟아온 것 같다. 이것은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나는 예술이 다른 활동이나 직업에 비해 그 효용이 필수적이지 않다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답을 찾지 못해 계속 사회적 채무감에 시달려왔다. 예술을 '수단'으로만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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