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Mist
반투명 필름, 반투명 비닐_장소 특정적 설치_2019
frosted film, frosted vinyl_site-specific installation_2019
비가시적 제약에 대한 탐구다. 생활 공간 곳곳에 반투명 비닐을 설치하여, 건너편의 정보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를 통해, 상존하지만 잘 드러나지 않는 제약들, 그것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 제약을 끌어안으면 얻을 수 있는 것들 따위를 헤아려 보고자 했다. 늘어난 절차는 지각의 속도를 늦추지만, 인식의 해상도를 높인다.
작가노트
안개를 만나면 긴장한다. 아련한 품 안에 사나운 모서리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까닭이다. 그래서 익숙한 길도 안개가 끼면 생경한 길이 된다. 불안하고 불편하다. 어쩌다 사고가 나면, 안개는 불현듯 거대한 손아귀로 바뀌고, 나는 실제보다 작게 우그러진다. 나는 자주 그런 식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삶에는 항상 안개가 끼어 있었다. 확실한 것은 드물었고, 어떤 길이든 생각지 못한 위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개는 삶의 조건이다. 나는 제거할 수 없는 안개를 거부하는 것을 그만 두고, 안개를 배우기로 했다. 안개는 판단을 보류하게 한다. 알고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상기시킨다.
안개를 빚는다. 구체적 풍경은 추상적 화면이 되고, 갑갑한 간격은 성찰의 여백이 된다. 문자를 읽은 것이 문장을 이해한 것으로 처리되지 않도록 거듭 안개를 펼쳐 자동적 판단에 제동을 건다. 힘들다. 아무래도 갑갑하다. 그래도 익혀야 한다. 그래서 익혀야 한다. 안개는 구속이 아니다. 해방이다.
전시서문
- 최은설 큐레이터
동덕여자대학교 대학원 전시기획실습인 유리프로젝트는 예지관 10층 건물을 전시공간으로 사용하며, 전시의 주제이자 매체가 되는 유리를 소재로 기획되는 프로젝트이다. 첫 번째 유리 프로젝트Ⅰ: 가없는 바다⟫는 김남훈 <모스> 연작으로서 빛과 사물을 투과시키는 유리의 특징을 활용하여 바깥으로 빛/신호를 보내고 사라지는 이들을 기억하고자 하였다. 두 번째 ⟪유리 프로젝트 Ⅱ : ‘나는 유리라는 여자를 알고 있다.’⟫는 진시우가 유리를 매개로 하여 일상과 예술 사이의 갈등에 대한 설치 작업을 진행하였으며, 유리와 유리 너머의 사물을 떠올리려고 하였다. 세 번째 2019년 ⟪유리프로젝트 Ⅲ : 안개⟫는 유리프로젝트의 연작 기획으로 박호은이 유리창을 매체로 대상의 구체성을 흐리는 설치 작업을 한다. 관람객은 유리창으로 연결된 익숙한 장소를 반투명시트/반투명비닐이 부착된 매개체를 통해 사물을 재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박호은의 작업은 반투명시트지/반투명비닐을 사물에 부착해 시야를 가로막는 것에서 시작된다. 복도 쪽 유리창에 부착된 반투명시트지에 새겨진 텍스트는 정면에서 바로 인식할 수 없지만, 밖에서는 텍스트를 읽을 수 있다. 유리창에 부착된 시트지의 ‘look’은 좌우가 뒤집어진 형태이며, ‘look’의 가운데 oo는 사람의 두 눈의 간격과 일치한다. oo로 뚫린 구멍에 눈을 대고 들여다보면 밖을 바라볼 수 있다.
엘리베이터 오른쪽 유리창에 부착된 반투명시트지는 하나의 텍스트를 안개 형태로 보이게끔 여러 번 겹쳐서 덩어리진 모양으로 만들었다. 텍스트의 의미는 사람의 인식을 가로막는 다양한 생각의 뒤얽힘과 반복의 과정을 담고 있다.
복도에 위치한 게시판에는 반투명비닐이 덮여져있다. 그것은 사물에 대한 인식을 불확실하게 만든다.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고, 시야를 가로막는 반투명비닐을 제거해야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화장실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판의 이미지는 남녀를 구분하는 아이콘의 어깨 아래 부분을 반투명 시트지로 여러 번 겹친 것이다. 표지판의 성별을 나타내는 것은 옷차림이나 자세, 색상의 차이로 알 수 있는데, 반투명시트지로 하단 부분을 가린 표지판만을 보아서는 구분하기에 어렵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입구에는 길게 늘여져 있는 반투명비닐이 건물의 층수를 나타내는 ‘10’이라는 숫자를 덮고 있다. 이는 관람객에게 현재 위치한 공간을 뜻하는 숫자의 의미를 가로막는다.
복도 끝 한쪽 모서리에는 3개의 LED조명이 소실점처럼 설치되어 있으며, 숨 쉬는 것처럼 깜박인다. 그 앞에 설치 된 반투명비닐이 안개처럼 LED조명을 가리고 있다. 서서히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것을 반복하는 빛은 개인의 이상과 꿈을 나타낸다. 깜박이는 LED조명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을 알려주는 것 같지만 뚜렷하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예지관 10층에 자리하고 있는 다양한 사물들은 반투명시트지로 인해 흐려지고, 변형되고, 경계가 사라지게 된다. 이로써 관람객의 시야를 가로막아 불안함과 불편함을 주게 된다.
익숙한 공간/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각자의 삶에 길을 만들어간다. 시야를 흐리게 하는 안개는 걸음을 멈추게 하고 미묘한 긴장감을 준다. 늘 선택의 기로에 멈추게 되는 사람들의 삶은 안개에 둘러싸여 있다. 모든 선택지에는 Yes or No로 나뉘게 되고,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든 책임이라는 무게를 견뎌야한다. 선택의 순간에 안개에 휩싸여 혼란스러움을 겪는 것을 보면, 안개는 방황의 조건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안개는 우리로 하여금 여러 불확실성을 통과하며 성숙해지고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