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 《반쯤 열린 방》

나푸름 소설가

   문을 열었다.
   본다는 행위는 참 신기해서, 우리는 그 하나의 감각 기관만으로도 아주 짧은 순간에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멀리서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엄마를 보고, 저기 엄마가 있다는 것, 그녀가 내 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손쉽게 알아챌 수 있다. 우리는 사진 속에 있는 그녀도 바로 찾아낸다. 심지어 집에서 셀카를 찍다 우연히 걸린 엄마의 발이나, 그녀의 뒷모습만을 보고서도 “아, 여기 엄마가 있네.” 하고 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사진에 찍힌 엄마는, 그녀의 재현이지 그녀 자체는 아니다. 
   미술관 1층. 그 반쯤 열린 방에 들어갔을 때,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김민주 작가의 작품은 사진으로 본 엄마가 모방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처럼, 우리의 일반적 사고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지점에 위치하여있다. 뒤집힌 글씨로 써진 ‘공개된’ 일기(<일기>)는 우리의 인식을 방해함으로써 공개된 채로 숨겨지고, 입체적인 우물의 공간 속, 환한 달과 숲의 평면적인 전경(<생각의 우물>)은 정작 실제적 존재는 생략됨으로써 우리의 사고를 지체시킨다. 그것들은 발치에 떠 있는 <그물-물결>의 그림처럼 ‘적당한 장소’에 위치하여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일기도, 우물에 반사된 달빛도, 물결도 이곳에 ‘제대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눈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다. 재현된 모방은 기억의 매개가 된다. 비록 사진 속의 엄마가 엄마 자체는 아닐지라도, 우리는 그 사진을 보며 그녀와, 그녀와 함께했던 그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때문에 모든 사물이 모방된 작가의 공간에서, 우리는 모방될 수 없는 자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성의 반대편에 서보기로 했다. 재현된 모든 것은 마음속에서만큼은 진짜가 될 수 있다. 
그러자 나의 발치에는 강물이 흘러 물결이 치고, 나는 달빛이 환한 숲 속에 있다.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작은 집이 있고 그 뒤편에는 계곡물이 흘러 흘러 내 발치에 닿는 것이다.(<사유산수>) 나는 거기서 얼핏 작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림 속의 작은 집에서 방금까지 누군가가 읽고 있었던 것처럼, 펼쳐진 책이 창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계단을 내려갔다.

   점멸하는 푸른빛과 내려앉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조명이 꺼지면 주변은 완전히 어두워졌는데, 누군가의 마음속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발밑을 바라보니 모든 사물은 쓸모를 잃은 듯이 흩뿌려져 있었고 누군가를 초라하게 만드는 말들이 적혀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나는 알지 못하고, “도망치고 싶은”데, 그것 또한 “아무 소용 없”다.* 찰나의 말들은 글자가 되어 내면의 바닥을 긁어댔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무기력’이었다.

   시각에 의한 인간의 인식과정은 기본적으로 빛이 물체에 닿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인간은 어둠 속에서는 볼 수 없고, 빛 속에서만 사물을 인식할 수 있다. 지하1충에 위치한 박호은 작가의 전시는 공간적으로 빛이 차단된 곳에서 관람객의 시각을 제한하는 방법을 통해 개인의 내면세계를 표현하였다. 그는 이번 작업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샅샅이 훑어, 그간 스스로를 괴롭혀왔던 무기력의 근원을 찾는 과정을 제시했다. 편견과 권력, 욕망을 나타내는 수많은 문장들은, 결국 대상의 ‘무기력’을 낳은 것이 타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무기력이 몸집을 키우도록 상처를 긁고 파내 스스로를 무력화시킨 것은 자기 자신의 말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깜박이는 빛 속에서, 눈은 사물의 제대로 된 형상을 보지 못한다. 인이 되어 바닥에 박힌 말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순간의 빛에 의지하여야만 잠시라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짓눌린 상처들은, 너무 찰나의 순간만을 허락했다. 그래서 약을 바르는 것 같이 제대로 된 치료를 할 수도 없다.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작업 도구와 미완성의 작품 들처럼, 기력과 의지와 생기는 내팽개쳐 졌다. 끊임없이 가라앉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막연한 불빛으로 다가갔다. 무너져 내린 천장은 머리와 지나치게 가까웠고, 무너질 듯 위태한 어둠속에는 파쇄 돼 쓸모없어진 종이들이 상자 안에 가득 했다. 그런데 그것이 빛을 증폭시켰다. 쓸모없음을 표현한 사물들은 그것을 표현한 그 순간부터 ‘쓸모’를 갖게 됐다. 점멸하는 빛은 장면과 장면 사이에 공백을 만들어내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완전한 어둠과, 찰나지만 전체를 밝히는 빛과 마주하게 된다. 상처는 아물지 않고 흔적을 남길 것이다. 작가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대상과의 마주함을 택했다. 그리고 그러한 작가의 용기는 누군가의 내면에도 틀림없이 존재할 두려운 어떤 것에 대한 힌트, 혹은 그것을 인식하게 될 계기가 되리라.

* 작품 <납작한 심연> 중 바닥에 적힌 말들을 모아 만든 문장.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김지연 작가의 작품을 관람하기 위해 2층에 들어서기 전부터, 나는 풀벌레 소리를 먼저 접했다. 시각보다도 청각이 먼저 활성화된 셈이다. 반쯤 열린 창문을 통해 어둠이 보였고, 거기가 지금 밤이 됐다는 것을 알았다. 그곳에 있는 창문은 실제 사물로의 ‘창문’이었으나, 창문 밖은 실제의 밖이 아닌 ‘밖으로 상정된 공간’이었다. 나는 잠시 반쯤 열린 창문을 바라보다, 밖으로 목을 뺀다거나 몸을 기울이지 않기로 정했다. 창문을 열어두긴 했지만, 밖으로 제시된 그 공간은 청각의 공간이라고 생각했고, 작가의 작업이 밖을 보지 않고도 밖을 볼 수 있게 하리라 여겼다. 
   대신 작가가 준비한 시나리오대로 아주 천천히, 작가가 준비한 지문을 읽어냈다.(<새는 소리, 새는 시간 (2016)>) 작가는 녹음된 소리와 소리 사이의 거리, 낙차 등을 활용하여 창밖의 존재와 창안의 존재인 나를 연결하였고, 청각으로의 집중을 통해 같은 소리 속에서도 각기 다른 음정을 인지시켰다. 새소리와 바람 소리, 물소리 등이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졌다. 살면서 경험했던, 비슷한 소리를 들었던 혹은 보았던 곳의 전경이 떠올랐다. 나는 완전한 실내 공간에 있었는데, 과거의 소리를 들으며 바깥으로의 공간적 변화를 생각하기도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청각을 가시화한다는 것은 생각이나 내면을 가시화한다는 것과는 다른 층위의 개념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앞의 두 작가의 작품이 후자의 경우를 보여주었다면, 김지연 작가의 작품들은 전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지연 작가의 작품 또한 청각의 가시화를 통해 개인이 느꼈던 생각과 감정을 관객과 공유하기 위한 작업이다. 결국 세 작품은 내면, 혹은 경험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즉, 《반쯤 열린 방》의 의미는 각각의 작가가 자신의 방문을 조금 열어둔 뒤, 그들을 찾아온 낯선 방문자를 도리어 자신의 방으로 초대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편 김지연 작가의 작품은 앞의 작가들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여, 《반쯤 열린 방》이라는 전시 명에 직접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청각자극을 매개하여 창문을 경계로 한 각각의 공간을 ‘실제적 공간’으로 창출해내는 작업은, 작가와 관객의 소통이 도달하는 지점을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작가 개인의 경험이 관객 개인의 경험으로 전이되는 현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