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지형도를 그리는 작가 박호은

2015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전문가 비평 프로그램

김인선 윌링앤딜링 디렉터

 

   박호은 작가는 전시를 보러 가면 작가는 없고 작품만이 있는 점이 맘에 들었다고 했다. 작가는 말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존재라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작가가 되기로 하고 깨달은 것은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작가로서 말을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작가로서는 다행히도 그는 말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작가이다. 박호은 작가는 나와의 첫 대면에서 그가 말을 더듬는, 정확히는 말막힘 증상을 겪고 있다는 것을 얘기해 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말막힘 증상에 대한 작가의 설명은 꽤 방대하고 길었다. 자신의 몸에 나타난 직접적인 증상이라 당연히 그렇겠지만 매우 전문적이고 세심하게 알아보고 이를 분석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는 이러한 증상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얼마나 우울하게 보내도록 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였다. 그는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혹은 논쟁에서 긴박감이 느껴지거나 빠르게 대처해야 하는 경우를 놓쳐버렸던 적이 대부분이었고 이러한 과정의 반복은 그에게 스스로의 언어적 한계에 대해 고심하는 계기를 가지고 왔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 긴 이야기를 듣는 동안 작가가 말을 심하게 더듬거나 말이 막히는 증상이 두드러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의 증상에 대한 스스로의 반응으로서 당연하게도 그의 작업 속에서는 언어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담은 다양한 시도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언어가 소통을 위한 매개로서 사용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신체 조건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여 생기는 소통의 오류들에 대하여 보다 직접적으로 대면하면서 살아가는 입장으로서, 언어를 통한 상호 비소통적 상황은 자연스럽게 작품의 주제로 꾸준히 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관찰과 비판적 태도는 작품을 통하여 그동안 답답하게 막혀있던 말을 시간을 들여 찬찬히 하나씩 풀어놓게 하였을 것이고 그것은 점차 작가에게 그 누구보다 언어에 능숙하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가는 심지어 말을 잘하는 작가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한 것은 박호은 작가가 입으로 펜을 물고 그리는 <Mouth Drawing(2015)>을 진행하는 동안 능숙함의 경험에 대하여 이야기했을 때였다. 이 작업은 언어적 소통의 어려움을 물리적, 신체적 감각으로 환원하여 만들어내는 것이다. 해외에서 만난 사람들의 실루엣을 입으로 그려 대칭시키고 그 아래 이들의 자필로 적은 이름 역시 입으로 쓰는 드로잉이다. 외국어를 사용해야 하는 환경 속에서 마음대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답답한 상황을 표현하는 것인데 작가는 입으로 힘들게 그린 그림들이 어느새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2015년도에 제작된 <Translated Landscape>의 경우는 그해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방문한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지역의 건물 간판들을 포토샵을 활용, 한국어로 번역하여 재배치하는 작업이다. 여기에는 현지 언어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작가의 심정이 내포되어 있다. 이 작업은 바르트의 기호학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표시와 의미가 하나가 되어 진정한 의미가 되는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일반적인 소통의 공식이 무시된 채, 읽는 주체에 따라 그 의미가 불분명해지거나 명확해지는 구조적인 맹점 또한 동시에 발견하게 된다. 즉 의미와 기호가 어느 한쪽의 모국어가 아님으로써, 혹은 어느 한쪽만의 모국어이기에 발생한 소통의 부재가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관객 스스로 삭제해버린 기호에 대한 의미적 해석은 경험으로부터 형성되고 있는 기호에 대한 인식과 각인된 기억 및 학습에 의한 일종의 관습적 행태로서 드러난다. 이때 현지인들에게는 익숙하고 유명한 건물들이 무엇인지를 굳이 간판을 통하여 습득하지 않아도 되는 관습적 인식의 태도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완벽하게 조작된 장면에서 낯선 이물감을 발견한 이들은 작가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이 간판은 건물 어디서 찾은 것인가요?”

   같은 기간 제작된 작품 <Sign>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기호적 상징, 즉 손바닥 모양위에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라는 매우 명확하고 명료한 언어가 전혀 기능을 못하게 되는 사태가 일어났던 것이다. 발자국 모양에 으레 서있는 위치를 지정해 온 관습은 ‘작품을 밟지 마시오’라는 강력한 문구를 무너뜨린다. 이는 작가가 한쪽 벽에는 손바닥을, 한쪽 바닥에는 발자국을 그리고 그 위에 각각의 문구를 한국어로 표기하여 한국이 아닌 곳에 놓게 되면서 문자가 의미하고 있는 지시사항은 그 기능을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언어가 해당 문화권을 벗어나면서 기호로서의 완벽한 실패를 여실히 보여준다. 의미를 전달받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기호가 해당 문화의 테두리 밖으로 벗어났을 때 기호를 받아들이는 주체인 관객들은 이를 의미로서 인지하고 못하고 객관적 상징 체계로만 이를 분류하고 습관적으로 행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전 작업들을 살펴보면, 그의 작품은 논리성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꽤 감정적이다. 즉 그것은 개인의 관습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해 보인다.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바로 반응을 하고 싶었던 억울하거나 반박의 여지가 있거나 부당한 얘기 등에 대한 반응이 스스로 빠르지 못해서 놓쳐버린 순간들에 대한 자기 치유적 방식일 수 있겠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어떻게 하면 최대한 드러내고 반발하고 저항할 수 있을지 그의 작품 속에서 호소하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면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 대해 느끼고 있는 숨 막히는 상황에 대한 작가의 해소법이기도 하다. 이러한 방식은 일종의 공감대를 형성함으로 인하여 관객과 상호 소통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동안 그는 사회적인 소통의 창구로서 이러한 주제들을 다루어 왔던 것 같다.

   작품 <하이에나>는 작년(2014년) 4월에 전 국민이 생방송으로 목격하면서 애타했던 세월호 사건 이후 작가로서의 발언이 필요하다고 느낀 작가의 퍼포먼스 작품이다. 2015년 초에 그는 시청 앞에 포스터 형식으로 제작한 전단지를 쌓아두고 사람들에게 가져가게 하는데, 그 전단지가 쌓여있는 단면에 가라앉는 세월호 이미지가 선명하게 프린트 되어 있고, 전단지가 하나씩 소진되면서 단면의 이 이미지도 점차 깎여 나간다. 전단지 앞면에는 글씨가 빼곡한데, 읽어보면 세월호 사건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차가운 시선의 시위 문구, 칼럼 내용, 인터넷 댓글들이 발췌되어 실려 있다. 작가는 이를 추운 날 시청 광장에서 일인시위 하듯 서서 사람들에게 세월호가 점점 잊혀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각인되었던 아픔이 냉랭한 시선에 의해 점차 사라져가는 듯한 분위기를 작가는 그의 언어로 상기시키고 있었다.

   <당신은 왜 자살하지 않(았)습니까?(2011-2012)>와 <Death Mask(2012)>는 ‘자살’이라는 사회 문제를 다루는 작업들이다. 한국의 자살은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와우아파트 등의 붕괴로 인한 국가적 재난과 마찬가지로 그 위험수위가 높다. 특히 <당신은 왜 자살하지 않(았)습니까?>에서 배열하고 있는 실제 유서 내용들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모든 이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노출한다. 자살 전 남겨진 유서는 더 이상은 소통할 수 없는 일방적인 소통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개인이 사회로 던진 메시지이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사실 더 큰 사회 구조적 문제로부터 기인하였음을 알린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다수의 지속적인 고민을 불러일으키게 되며 소통의 부재의 극단적 상태로부터 출발하는 사회 문제이기도 하다. 유서 속에 담긴 죽음의 내용은 다른 누군가가 똑같이 겪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작가는 관객들에게 되묻는다. 당신이 자살을 택한 저들과 달리 살아남아서 이것을 읽고 있을 수 있게 한 것이 무엇이었을지.

   작가의 작업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언어의 논리성을 의심하는 작업을 만나게 되는데, <왈왈!(2011)>이 그것이다. 이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문구를 그린 액자 위로 다른 문장들이 프로젝션 되는 작업인데, 이는 특정 문구를 의심 없이 수용하고 당연시하며 일반화되어 소통하는 사회에 대한 의문점을 제시하는 작업이다.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수용된 특정 문구인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는 사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작가는 이것의 논리를 증명하고 있다. 가장 스리랑카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 가장 방글라데시적인것도 가장 세계적이다 / 가장 미국적인 것이 세계적이지 / 가장 된장스러운 것이 가장 음식스럽다 / 가장 트로트적인 것이 가장 음악적이지/가장 문학적인 것이 가장 학문적이다 / 가장 성스러운 것이 가장 상스럽다 / 가장 예쁜 여자가 가장 착하다 /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심오하다 류의 비논리적이면서 같은 구조로 만들어진 문장들을 지속적으로 제시하면서 익숙해진 비논리적 오류에 대한 두려움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회 문제가 곧 개인의 문제이고, 개인이 곧 사회를 대변한다는 차원에서 작가의 관심은 좀 더 자신에게로 향하게 된다. 그는 교환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프랑스에 가서 작업하던 중 그러한 계기를 얻었다고 한다. 프랑스어를 모르는 채 타국에서의 말문이 막히는 경험은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은 경험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는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말문이 막혀버리는 말더듬 혹은 말막힘 증상이 장애로 다가왔다면 프랑스에서의 언어의 불통은 이 나라에 살아본 경험이 없는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당연한 현상이었기 때문에 여유롭게 이 상황을 풀어나갔으리라 짐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문제를 타인의 문제와 동일시하는 순간 나의 시선이 스스로에게 집중 되는 것이 그리 불편하거나 자신만의 약점처럼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박호은 작가가 다루고 있는 언어의 문제는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로 들여다보아지지 않는다. 개인의 문제는 사회로 확장되고 있었음을 작가는 스스로 작업을 진행하면서 강하게 인식하게 된 것 같다. 자신의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점차 스스로에 집중하게 되는 변화 또한 감지된다. 동시에 작가는 형식과 내용의 균형을 고민하고 있다. 자칫 형식이 빈곤해진 작업으로 귀결되지 않기 위한 그의 작업의 행보가 흥미롭고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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