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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은, 언어와 시선의 분석가

- 말과 눈길을 따라 걷는 이
2024 하정웅청년작가초대전

사이: 현실과 이성

2024. 12. 18 - 2025. 2. 16
하정웅미술관 갤러리 2, 3

허경 철학학교 혜윰 교장

​​

“바라보는 시선이 지배하는 시선이다.”
- 미셸 푸코, <임상의학의 탄생>(1963)

1. 불편하고, 불온한

    박호은의 작업은 어떤 경우에도 심미성과 사회성이라는 자기 문제의식의 두 가지 축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늘 어떤 경우에도, 오늘-여기-나라는 조건에 연결되어 있다(이 ‘나’는 물론 큰 나, 곧 ‘우리’로도 확장된다. 사실 박호은의 세계에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어떤 누구도 버리고 싶어 하지 않는, 박호은은 이런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휴머니스트, 나아가 ‘비인간 존재’ 모두를 포괄하는, 확장된 의미의 코스모폴리턴이다). 오늘 여기, 나와 우리를 다룬다면, 즐거운 것만 이야기할 수는 없다. 우리의 행복과 마찬가지로 불행에 대해서도,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는) 그 근원적 조건에 대해서도, 심미적 방식으로, 자신의 해석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박호은의 작업은 불가피하게 불편해지고 불온해진다. 박호은 포트폴리오는 이런 문장으로 서막을 연다.

    “자연ㆍ사회ㆍ자아가 가하는 여러 압력을 다루고 있다. 설치, 조각, 수행, 아카이빙 등의 방법으로 문제를 받아내며 바라본다. 정확한 응시는 짓누름을 용해한다.”

 

    이번 하정웅미술관 2층에는 작가 인터뷰 동영상이 있다. 박호은은 자신과 자신의 작업을 소개해 달라는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저는 살면서 겪게 되는 고통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서 연유하고, 이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탐구와 성찰, 실천을 작업화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삶의 딜레마, 사회 부조리, 자기 모순 등과 관련한 여러 소재를 다루어 왔습니다. 제가 직간접적으로 처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설치, 조각, 수행, 아카이빙 등의 방법으로 들여다보면서 제가 반복적으로 시달리던 압력, 우울, 괴로움 등은 저의 회피나 외면 속에 커지고, 그로 인해 더 큰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어떤 것이든 정확히 보고자 하는 태도를 바탕으로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박호은은 고통을, 피하지 않고, 응시한다.

2. 고통에 대한 응시

    이는 박호은이 정확한 응시가, 실은 정확한 응시만이, 짓누름, 곧 압력을 용해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있기 때문이다(이는 ‘응시가 인식을 가져오고, 인식이 치유를 가져온다’는 정신분석적 관점으로도, ‘응시 그 자체가 깨달음을 가져와 풀려남, 해탈을 가능케 한다는’는 불교적 관점으로도 읽을 수 있다. 상호보완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압력은 바깥의 자연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그러나, 늘 결정적으로 안쪽으로부터, 곧 자아로부터 온다. 압력은 바깥의 자연과 사회, 그리고 안쪽의 자아, 곧 나의 내면으로부터 온다. 곧, 압력은 총체적이다. 스스로를 감시하고 처벌하는 자연과 사회와 나의 (초)자아로 둘러싸인 내게 출구는, 없거나, 거의 없다. 이 전면적인 감옥 또는 지옥은 물샐틈 없이 전면적이고 총체적이어서, 바깥이 없거나,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파스칼의 말대로, 미침의 또 다른 형태일 것이다. 이 ‘없거나, 거의 없는’ 출구는 오직 응시(gaze)에서만 온다. 고통에 대한 응시(gaze at pain), 이것이 이번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하정웅청년작가초대전 빛 2024 - 사이: 현실과 이성> 중 박호은의 전시실 벽면에 적힌 글이다(모두 4명이 선정된 전시에는 이외에도 강민기, 윤준영, 장재민이 참여했다).

    박호은은 그것이 자연적이든 사회적이든, 육체와 정신을 막론하고, 고통을 응시한다. 이것은 박호은의 작업이 보여주는 일관된 작가적 태도이자, 심미적 전략이다. 이러한 응시가 편안하기만 할 리는 만무하다. 따라서 박호은의 작업은 차라리 나와 우리의 ‘편안한 기반을 뒤흔들도록 잘 설계된’ 하나의 심미적 장치, 불편하고도 불온한 설치이다. 폐수영장에서 열린 2011-2012년의 <당신은 왜 자살하지 않(았)습니까?>는 자살한 이들의 유서를 모아 전시한다. 이를 보는 ‘산’ 관객은 ‘죽은’ 이들의 글을 읽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2015년 3월 6일 금요일 11~19시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전단을 나누어주는 형태로 이루어진 퍼포먼스 작업 <하이에나>는 세월호 이후 쏟아져 나온 ‘왜곡과 몰이해의 폭력적 시선, 담론’을 작업한다. 언어폭력은 물리적 폭력만큼이나, 때로는 그보다 더, 폭력적이다. 언어폭력은 아예 무시되거나, 또는 오직 폄하되면서만 인식되는 인식의 폭력에 기반한다. 언어폭력, 인식폭력은 폭력의 사소한 사례가 아니라, 폭력의 근본 형식이다. 2016년의 ‘무기력’을 작업한 <납작한 심연>은 ‘우리를 무기력에 빠뜨리는’ 문장을 모아 전시한다. 포트폴리오의 작품 설명에서 박호은은 이렇게 말한다. “내적 문제는, 들여다보지 않으면 납작하게 은폐되고, 방치 속에 깊어진다.” “나는 피해자잖아, 수용하세요, 너무 늦었어, 망신당하고 싶어?, 생산적인 일을 해야지, 하고 싶은 게 없다, 도망치고 싶다, 나중에, 한방에, 이것만 아니었으면, 낄 자리가 없다, 아무 소용 없어, 멋있어 보이고 싶다.” 자, 당신은 몇 가지나 공감하는가? 얼핏 긍정적인 말도 실은 담론효과는 부정적으로 난다. 미셸 푸코가 벼려낸 담론분석에서, 담론은 의미론적 층위, 의식적 층위, 무의식적 층위와는 또 다른 층위, 곧 언어 그 자체의 작동효과에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가령, 다음의 문장을 생각해 보라. 늘 진실과 진정성을 마음에 두고 10년쯤을 살면, 그 사람은, 실제 현실에서는, 진실하고 포용력 있는 사람이 될까, 진실하지 못한 자신과 타인을 경멸하는 사람이 될까?). 이번 하정웅에서도 약간 변형된 형태로 출품된 2017년의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에서 박호은은 죽음충동을 다룬다. ‘자살’을 뒤집으면 ‘살자’가 되듯, “매일밤 잠자리에서 뒤척이다 내뱉는 말 ‘죽고 싶다’가 기실 ‘살고 싶다’의 굴절된 신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고 싶다.” 한 작가, 한 인간으로부터, 이토록 정직한, 이토록 용기 있는 고백을 듣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인간은 “무섭고, 두렵다”는 한 마디를 못해, 일상의 생활세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행동을 충실히 수행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2019년의 <서다>는 트럼프 카드를 브라켓과 볼트로 조여, 서 있는 두 다리의 형상을 만든 작업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자신에 대한 몰이해와 부적절한 자기 압박의 재조형을 형상화했다.” 2018~2019년의 <직선: 수면 드로잉>과 이듬해인 2020년의 <생활조각>은 수면 시간을 그래프로 처리하여, ‘했어야 하지만 하지 못한’ 것들을 전시한다. 이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을 오히려 자신에 대한 적절한 통제를 위한 장치로 삼는다. 2020년의 설치 퍼포먼스 <interlude>와 2021년의 시민 참여형 미디어 조형물 프로젝트 <미래 조각>은 모두 팬데믹 이후 예술가의 역할과 시민의 태도에 대한 고민을 은유적으로 드러낸 작업이다. 전시장에서 철거된 강화유리 폐기물로 작업한 2021년의 <다각선>은 ‘삶과 빛’을 주제로 작업하는(이는 사실 ‘죽음과 빛’을 주제로 작업하는 박호은에 대한 묘사로도 적합하다.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의 말대로, 죽음이 없다면 삶도 없다) 뛰어난 음악가 피아트 룩스(fiat lux)가 참여하였다(이번 하정웅 전시의 음악-음향도 바로 그의 작업인데, 이번 작업은 ‘다른 음악-음향 효과였다면 작업이 완전히 다르게 보였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현재의 작업과는 다른, 더 좋은 작업을 상상할 수 없다는’ 정당한 의미에서 협업이라 불려야 마땅하다. 때로 역할을 바꾸어가며, 삶과 죽음을 작업하는 두 작가가 함께한 이번 작업은 이상적 콜라보였다). 2023년의 설치 <파란 돌>은 건물 옥상에 깨어진 유리조각을 펼쳐 놓고, 올라가는 계단에는 한강의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 중 일부가 발췌되어 있다. 작품 설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죽음 너머의 시야를 담고자 했다. 깨달음은 현실 위에서 이루어지고, 현실을 빛으로 물들인다.” 작가는 발췌한 내용을 이렇게 요약한다. “소설 속 인물은 고통스럽게 생명을 부지하던 어느날, 이미 죽어있는 꿈을 꾼다. 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햇볕을 받으며 시냇물을 들여다보다가, 아름답게 빛나는 파란 돌을 발견한다. 돌을 주으려던 그는 손을 뻗다가 불현듯 깨닫는다. 그걸 주으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2023년의 <비틀린 사선 거울>은 사선으로 설치된 거울필름을 사용했다는 면에서 이번 하정웅 전시의 프리퀄이다. 현대음악 그룹을 이끄는 뮤지션 지박의 프로젝트 <음악전시: blur> 참여작이다. 이처럼, 박호은의 작업은 스무살 초반의 카뮈가 적어놓은 잠언에 일치한다. “빛을 향해서도 어둠을 향해서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둘 모두를 직시해야 한다.”

    달리 말해, 박호은은 근본적으로 시선(視線), 눈길을 다루는 시각 예술가이다. 그리고, 시선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다. 박호은의 작업은 따라서 근본적으로 시선의 정치학이며, 박호은은 눈길의 정치학자이다. 박호은은 ‘눈길을 따라 걷는 자’이다. 미셸 푸코가 자신의 『임상의학의 탄생』(Naissance ce la clinique, 1963)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보는 자가 지배하는 자이며, 보여지는 자가 지배당하는 자이다.” 마찬가지로, 말하는 주체, 곧 “규정하는 자가 지배자이며, 규정당하는 자가 지배당하는 자이다.” 생각해 보면, 박호은은 늘 말과 눈, 언어와 시선을 작업해 왔다. 박호은은 언어와 시선을 다루는 시각예술가이며, 박호은이 수행하는 것은 언어와 시선에 대한 분석이다.

3. 어둠 너머의 풍경 a landscape beyond darkness

 

    박호은의 이번 하정웅 전시는 <어둠 너머의 풍경>이라는 큰 제목 아래 2개의 전시실을 활용하여 각기 작업 <유성의 숲>과 <뇌우의 밤>을 선보이고 있다. 작가가 직접 작성한 작업의 전체적 기획은 다음이다.

 

    “시지각적 착각을 일으키는 조명 효과를 통해 형상의 본질적인 변화와 움직임을 드러내는 설치 작품.”

 

    우선, 여러 개의 연결된 방에 거대한 은빛 비닐들이 점멸하는 조명 속에 사선으로 설치되어 있는 <유성의 숲>에 붙이는 작가의 말은 다음이다.

 

     “여러 개의 방이 연결되어 이루어진 「갤러리 2」에는 허공을 가로지르는 비틀린 사선의 거울 필름들을 설치하였다. 비정형의 공간 곳곳에 설치한 조명들은 하나씩 켜졌다 꺼지며 공간을 비춘다. 저마다의 각도로 쏟아지는 빛은 설치물에 실시간으로 새로운 음영을 만들며,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사물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움직임’을 환기한다. 안쪽 구석방에 설치한 구작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역시 이번 전시의 일부를 구성한다. 내가 매일 밤 토해대던 말 ‘죽고 싶다’의 뒷면을 이루는 ‘살고 싶다’를 달 표면 같은 액자들에 칼로 새긴 이 작품은 액자 뒤의 서서히 점멸하는 불빛들로 고요하게 공간을 밝히고 흐린다. 고통이 죽음을 경유하여 생명을 부각하듯.”

    다음으로, 허공에 느슨하게 설치한 거울 필름이 서큘레이터의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정방형의 단칸방 「갤러리 3」에 붙이는 작가의 말은 다음이다.

    “이곳에 설치한 조명은 빠른 점멸로 설치물의 움직임이 끊어지는 착시를 일으켜,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사물의 움직임에서도 매 순간 일어나는 ‘발생’을 환기한다.”

    각기 다른 듯 보이지만, 아마도 동일한 풍경들을 보여주고 있는, 이 둘 혹은 세 작업의 공통점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삶과 마음의 지옥을 보여 주려는, 들려 주려는’ 시각적ㆍ청각적 형상화 작업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실로 성공적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2개의 방, 그러니까 박호은이 펼쳐 놓은 삶의 지옥, 마음의 지옥, 생리적 지옥을 들어갔다 나온 당신의 마음은 편안해졌는가, 불편해졌는가, 아무 감흥도 없었는가? 마음과 몸의 끝없는 고통, 이 출구 없는 지옥을 다녀온 지금, 당신의 눈에는 번뜩이는 은빛 비닐이, 당신의 귀에는 날카로운 소리가 여전히 울리지 않는가? 이 닫힌 공간, 어디에도 안식과 위안이 없는 공간을 다녀온 당신은 어떻게 이 공간을 체험했는가? 만약 당신이 이 공간에서 나가지 못하고, 하루, 이틀, 한달, 일년, 그리고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될 것 같은가? 폐쇄공포증은 이 출구 없는 지옥의 상징적 질환이다. 실은, 이 ‘출구 없음’이야말로 현대성을 이해하는 핵심적 조건이다. 지옥에 출구가 없는데 미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이때, 미치는 것이야말로 정상이다. ‘최초의 현대인’이라 불리는 루소의 삶이 잘 보여 주듯, 현대인은 정상인이자 미친 사람이다(이 세계의 모든 사태를 일목요연하게 하나의 논리로,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사람,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 그 사이에 거리가 없는 사람은 - 착란상태에서 아내를 교살한 후 알튀세르가 쓴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가 잘 보여주듯 - 정신병자이다).

4. 박호은, 고통에 대한 응시

    “이 전시를 ‘영원한’ 고통에 스스로 못 박힌 이들과 나누고자 한다. 전시 경험이 그대의 몸에 영감을 주기를, 내게 찾아온 평화가 그대에게도 스미기를 희망한다. 지금 이 순간도, 빛은 어둠을 밝히며 그림자를 드리운다.”

    박호은의 미덕은 어설픈 해방과 해탈이 아닌, 고통과 지옥에 집중하는 태도이다. 이때 우리가 고통과 지옥, 죽음을 실체화하여 거기에 집착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노예로 남을 것이다. 풀려남은 - 결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인간의 소망의 세계에 투사하는 고진감래(苦盡甘來)가 아닌 -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자세에서만 온다. 새옹지마의 태도는 ‘내가 어쩔 수 없는’ 일, 곧 외부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사건을 바꾸려 하지 않으며(어쩔 수 있는 일을 무책임하고 무기력하게 당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직 ‘내가 어쩔 수 있는’ 나의 태도, 내게 일어난 일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온전히 집중한다. 에픽테토스가 말하듯, 내게 고통이 없기를 바란다면, 나는 영원히 고통과 세계의 노예가 될 것이다. 고통은 내적이든 외적이든 근본적으로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통의 유무가 아닌, 늘 변화하며, 때로 나타났다가 때로 사라지는, 고통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집중한다면, 나는 고통의 노예로 살지는 않게 될 것이다. 나는 때로 고통당하더라도, 나의 주인으로서 세계를 살게 될 것이다.

Between; Reality and Rationality.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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