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조각

박호은 : 자기조각

2019. 9. 20 - 10. 12

홍과홍갤러리

박호은

 

무기력은 중독이다. 여러 가닥의 원인이 뒤얽혀 미궁을 이룬다. 3년 전 〈납작한 심연〉(2016)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무기력을 형성하는 나의 오류와 타성들을 자각하게 되었다. 막연하던 무기력이 구체적인 요소의 합으로 보이자 해결도 가까워진 듯했다. 그런데 그것은 파고들수록 더 깊고 복잡한 뿌리를 드러냈다. 내가 유실한 것들을 찾아보는 〈숨바꼭질〉(2017), 체념적 습관을 뒤집어보는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2017) 등을 이어 진행하면서 이따금 좋아지기도 했으나, 이내 더 나쁜 상태로 무너져 내리곤 했다. 내 상태는 짐작했던 것보다 심각했다. '관찰과 인식'만으로 덤벼들 게 아니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았다.

 

'체계와 축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함께 생활을 조형해나갈 시각적 장치를 구상했고, 매일 도표를 채우며 자신을 점검하는 〈직선: 수면 드로잉〉, 〈생활조각〉 등을 진행하고 있다. 그렇게 나는 작가이자 관객으로서 작품을 만들어간다. 한편, 내면을 살피는 작업도 계속 해나갔다. 기존 작업에서 미진했다고 생각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보다 의식적으로 물질과 이미지를 대했고, 매체와의 관계를 통해 내가 사로잡혀 있던 생각들과 조금 더 거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서다〉, 〈헤엄치다〉, 〈구멍〉, 〈열쇠구멍〉 등의 작품은 그 과정의 형태들이다.

 

전시작들은 '규격과 변형'이라는 형식적 요소를 공유한다. 대개 A4 사이즈를 사용했다. 반으로 잘라도 비율이 바뀌지 않아서 종이의 낭비를 최소화하고, 그래서 국제 표준 규격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 불필요한 기력 소모를 줄이고, 삶에 최대한 적응해 보려는 내 작업의 방향과 어울려 보였다. 동시에 내가 구속되어 있는 무의식적 틀을 암시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A4 크기로 재단한 재료들은 칸 채우기/선 긋기, 구멍 뚫기, 수직으로 쌓기 등의 단순한 조형 방법들로 가공했다. 무기력의 극복을 삶의 기초를 다지는 작업으로 본 까닭이다.

 

분명히 달라졌다. 그리고 그 변화값이 꽤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아쉽다. 기대에는 많이 못 미친다. 더 독하게 했어야 했다는 후회와 이 또한 무기력을 심화하는 과욕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부딪친다. 〈조각음악 I, II〉는 이러한 고민에서 나왔다. 계속 나아가기 위해, 초라해 보일지라도 불필요한 투쟁을 줄이고 결과를 수용하는 훈련을 하고자 〈직선: 수면 드로잉〉과 〈생활조각〉의 기록을 악보로 삼는 음악을 만들었다. 고착된 사고를 흔들기 위해 이전엔 쓰지 않던 감각을 써 보는 것이다. 나는 청각으로 나를 재인식하며 아직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나갈 작업을 다시 구상한다.

Self-sculpture poster.jpg